라자루스
The Lazarus Effect , 2015

이 영화의 원제목은 The Lazarus Effect 이다. 라자루스 효과. 그럼 라자루스 Lazarus 는 무슨 뜻인가? 성경에서 나사로(Lazarus)는 죽었다가 예수에 의하여 되살아난다. 나사로는 예수의 친구였기에 나사로를 다시 살려낸 이 성경의 절은 예수의 인간적인 면과 신적인 영험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부분이다.
영화 제목으로 차용한 나사로의 이름에 ‘효과’를 붙였으니 <라자루스>가 어떤 영화인지 미리 감이 잡힐 것이다. 죽은 사람을 다시 되살리는 일, 그것은 분명 신의 영역이기에 인간들이 감내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것이 선험적으로 감지된다.

어느 한 연구원에서 죽은 개를 되살리는 실험을 성공한다. 이른 바 ‘라자루스 이펙트’ 연구원들에게 이 일은 꽤 성공적으로 보였지만 되살아난 개의 이상 행동은 이 연구가 완전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 개는 죽기 전의 개와 똑같지 않다는 점에서 이 불완전한 연구는 미래의 어떤 불행을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연구에 열정적인 연구원들은 급기야 사고로 죽은 동료에게 이 실험을 적용하게 된다. 연구비도 끊긴 마당에 절박한 심정으로 진짜 사람을 되살려야 가치를 인정받을 것마냥 실험은 행해진다. 마치 이 연구를 위해 죽은 것처럼 실험체가 되버린 동료 조이는 누구의 비난도 받을 필요없는 완벽한 실험 대상이었고 연구원들은 결국 그녀를 살려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되살아난 조이 역시 죽기 전의 조이가 더 이상 아니다. 무언가 다른 인격이 들어간 것 같은 존재로 바뀌어져 있다. 연구소의 갇힌 공간, 위험한 실험, 그리고 죽음을 겪고 난 인간의 변모는 연구원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온다.

2015년 여름, 공포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유명한 공포 영화 감독 제임스 완 감독의 영화 <인시디어스> 시리즈 3편과 <데모닉>이 연이어 선보이면서 올 여름은 공포영화가 풍년이다. 그 중에 이 영화 <라자루스>는 밀실 공포와 생사를 넘는 기괴한 경험을 상대하게 되는 짜릿한, 더위 사냥 공포 영화로 선보이게 되었다.
공포영화의 주요 소재와 공간인 치료병원, 정신병원, 고문실, 실험실, 대피실 등 사람들이 갇혀서 겪게 되는 난국은 유령과 같은 보이지 않은 실체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환자, 피실험체, 내적 자아 등과 같은 인간 실체로부터 공포를 전달하게 된다.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한 공포보다 익숙하고 잘 알아왔던 대상이 돌변하여 정체성을 잃게 되는 혼란은 과거를 기억하는 인간들에게는 또다른 공포의 한 줄기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죽음을 겪은 조이는 과연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스포가 될지 모르겠지만, 조이는 어려서 안 좋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평범한 소녀가 겪을 일이 아닌 화재에 대해서 조이는 완전 무결하게 피해자라고 볼 수 없는 미적지근한 부분이 있다. 특히 많은 사상자를 낸 화재가 방화에 의한 것이라면 직접적으로 범죄의 현장에 있었던 것이니 이 부분 또한 조이가 피해자이든 가해자이든 그 기억은 그렇게 성장기 소녀의 기억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따라서 죽음 이후로 영혼은 영혼이 가야 할 곳으로 당연히 가야 했지만 그 필수 코스를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했을 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자연의 이치를 거스른 대가를 치뤄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여기에서 공포가 시작되고 비극은 핏빛으로 물들게 되었다. 현실에서는 과거를 회개하고 용서의 길이 열려있어서 과거를 지우는 것이 가능하지만 죽어서는 현세에 살았던 모든 과업이 그대로 남아서 신의 심판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이 종말적 내세관은 서양의 종교관이나 내세 개념과도 상관 있지만 인과응보라는 불교적 실체와도 닿아있다. 즉,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과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당위성이 바로 그러하다.

죽은 자를 다시 불러오게 하는 주술은 예부터 인간이 행해 온 비현실적 모험이었고 그것은 희망 고문과 다름 없는 비극이었다. 서양의 좀비나 중국의 강시 같은 존재는 그런 인간의 비극과 같은 희망에서 비롯된 죽은 자의 도래이며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기준을 무너뜨리는 인간들의 참혹한 욕망을 대변한다.
하지만 더욱 참혹한 일은 죽었다가 돌아온 자가 행하는 똑같은 비극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내일은 다른 일이, 오늘보다 더 좋은 행운과 행복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하루를 지낸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더 나을 거라는 희망. 그런 희망은 힘든 오늘을 견디게 하고 과거를 이겨내게 하며 지금의 노동을 값지게 한다. 하지만 내일도 내일 모레도 매일매일이 오늘과 같다면? 변함없는 하루 하루가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이 말은 곧 내일의 희망이 없다는 뜻이니 이 영화에서 말하는 공포는 곧 희망이 없는 내일을 말해준다. 조이가 죽어서 본 지옥, 그 공포는 희망이 없는 현세의 삶과 마찬가지인 것. 조이가 묘사한 지옥은 이 한 마디로 잘 표현된다. “사람이 죽어서 가는 지옥은 살아왔던 인생에서 제일 최악의 시절로 돌아가서 그 시절을 무한정으로 반복해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짜 지옥이다.”

만약 지금의 힘든 현실이 견딜 수 없다면 더 힘든 것이 있음을 알게 하는 이 전언이 희망으로도 들리는 까닭이다. 지금 힘든 것이 계속해서 반복될 지옥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따라서 지금은 가장 힘든 게 아니다. 이 소중한 교훈을 얻기 위해서 연구원들은 공포 속에서 죽어갔다.
뜨거운 여름날이 곧 몰려올텐데 더위를 잊을 시원한 영화를 찾는다면, 그것도 공포영화를 한 편 원한다면 <라자루스>는 열대야까지 물리칠 수 있게 서늘하고 섬뜩한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조이가 죽기 전과 다시 살아나고 나서 변화된 모습을 특히 잘 관찰해두는 것이 관전 포인트다. 공포 영화 매니아라면 관람 목록에 필히 넣어야 할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