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상회
Salut D’Amour , 2014

<은행나무 침대>,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와 같은 굵직한 한국영화를 만든 강제규 감독이 눈물샘 자극하는 멜로 드라마를 만든 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언급된 영화들은 액션이 가미된 작품들이지만 그 속에서 이미 뜨거운 로맨스와 시대를 초월한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보석처럼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신작 <민우씨 오는 날>은 어쩌면 이 영화 <장수상회>로 가기 위한 초석처럼 또 하나의 빛나는 눈물 드라마이다. <민우씨 오는 날>을 먼저 재밌게 봤다면 <장수상회>는 다음으로 꼭 봐야 할 영화이고, 혹시 <장수상회>를 먼저 보게 된다면 <민우씨 오는 날>은 <장수상회>가 남긴 여운과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을 닦아줄 영화로 봐야 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강제규 감독의 <장수상회>는 의외의 반전을 점잖게 숨겨두고 주름진 사랑의 애틋한 표현들을 곱게 곱게 펴서 관객들 앞에 풋풋함으로 다가선다. 꼭꼭 닫아두었던 감정이 무장해제되는 그 느낌은 편안한 색채와 부드러운 장면들 사이사이에서 여유롭게 표현되고 있다.

장수마트에서 일하는 성실한 노직원 성칠(박근형)
따뜻한 말투나 온화한 표정을 가진 너그러운 할아버지의 모습을 기대하기엔 부족한, 해병대 출신의 딱딱하고 차가운 노인이다. 혼자 살고 있지만 혼자 사는 것 자체가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퉁명하고 불쾌한 할아버지일 뿐. 그런 성칠의 집 앞에 이사온 할머니 금님(윤여정)은 거친 성칠에게 사근사근하고 이해심 많은 여자로 다가선다. 차갑게 그저 이렇게 사는 생활이 전부인 성칠은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고 전봇대 뒤에 숨어서 마치 사춘기 소년처럼 금님을 훔쳐보기까지 하는 설레임을 갖게 된다.
황혼에 찾아온 로맨스, 그리고 인생의 짧은 시간 동안 늦게 찾아온 사랑이 아쉽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만큼 마음이 더욱 바빠지는 때, 서로의 소중함을 알기에 하루하루가 안타깝고 중요하다. 그렇게 서로가 가까워지면서 본격적인 만남이 이뤄지는가 싶더니 인생은 그리 평탄하지 않기에 이들에게도 시련이 닥치고 그 시련 뒤편에는 말하지 못한 아픈 사연이 있는데…

여기까지가 <장수상회>의 전반부를 훌쩍 넘는 일상적인, 그리고 드라마틱한 만남의 진행과정이라면 후반부로 가면 장수마트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나온 인물들의 관계도가 재정립된다. 감쪽같이 속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아마 그런 건 영화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꽁꽁 숨긴 비밀을 풀어내며 그 비밀을 숨긴 이유를 속살 보이듯 하나씩 알려준다. 그런 게 바로 영화가 할 수 있는 재치가 아닐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나 한 사람의 인생을 두고 쉽게 생각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좀 뒤로해도 좋을 듯 하다.

<꽃보다 할베>의 셋째 박근형은 최근 다녀온 그리스 편에서 아테네 연극 무대를 보고 히랍 연극 역사를 고대 신화와 함께 친숙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화적 배경을 익히 알고 있고 주인공들의 사연을 설명해주는 장면에서는 연극 배우로서, 드라마의 탤런트로서, 그리고 영화배우의 웃어른으로서 아직도 쟁쟁한 현역임을 보여주었다.
까칠한 성칠역의 박근형 연기는 자연스럽고 관록이 배어 있으며 마지막까지 그의 얼굴 주름과 울음은 마치 우리의 할아버지인듯 감정 이입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점점 잃어가는 기억은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쯤인지 중심을 못잡게 만들고 그런 경험을 실제로 해보지 못한 지극한 정상인들은 그런 감정을 알아보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험을 간접적으로 익히고 그 사람으로 들어가 연기를 한다는 것은 배우로서의 기본 소양이 아닌가. 꽃박람회장에서 길을 잃고 오지 않는 그 사람을 기다리며 대체 이 순간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하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며 슬픈 얼굴을 보여주는 박근형의 성칠은 바로 우리 주변의 이웃일 수 있다.

역시 해외 배낭 여행 여배우 편 <꽃보다 누나>에 나왔던 윤여정의 모습은 할머니, 노배우라는 수식어를 무시하게 한다. 곱고 단정한 여인으로 다가서는 온화한 표정의 숙녀가 성칠 앞에 있을 뿐. 꽃집아가씨처럼 꽃을 다듬고 꽃을 만지는 모습은 잃어버린 자아를 모르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사람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었으리라. 그런 고운 모습 앞에서 꽁꽁 닫힌 성칠의 마음이 열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그리고 처음 만난 것 같지 않은 느낌으로 오랫동안 곁에 있었던 그 느낌을 주는 인연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꽃보다 누나>에서 윤여정은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딱 잘라 말했다. 젊은 시절이 너무 힘들었다고,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으면서 얼굴엔 이렇게 금님처럼 편안한 표정을 갖게 되었으니 그것도 내공이고 복이다. 여배우로서 나이에 맞게 배역을 하는 것도 능력이겠지만 그런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은 인생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스릴러나 범죄물에 강한 캐릭터로 등장해왔던 조진웅과 카리스마 있는 역도 잘 어울리지만 이렇게 일상의 모습도 잘 어울리는 풋풋한 여배우 한지민의 모습은 장수상회가 보통의 마트가 아니게 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끝까지 버티는 사람과 그만 하라고 외치는 사람 사이에서의 간극은 얼굴 예쁘다고 다 통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한 가족을 구성하는 엄마 아빠 아들 딸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다 들어있기에 사람들이 공감하는 감정은 공통 분모를 찾아 눈물을 흘리거나 가슴 한 편의 찡한 마음을 갖고 부모님께 전화 한 통 걸게 하는 게 아닐까.

영화 후반부로 가게 되면 이미 결론이 난 결말에 대해서 헛된 희망보다는 그렇게 인정하게 되는 자연의 흐름을 인식하게 되는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전반부는 편안하게 후반부는 너그럽게 볼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는 정도로 리뷰를 마친다. 차분하게 볼 수 있는 5월 가정의 달 영화로서 단연 선두에 설만한 영화로 모든 부부에게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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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가족영화를 보고 싶은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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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C-Guy (파일조 무비스토리 패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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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상회>의 극적인 이야기는 가족을 위해 희생을 마다 않는 구성원들의 꿈과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장수상회>의 억지스런 이야기가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영화가 판타지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타까움이 역설적으로 가족애를 더욱 자극하기 때문이다. 조연배우들의 재치 넘치는 연기는 거친 전개과정에 윤활유가 되고, 성칠과 금님의 데이트에서 보이는 소박한 에피소드는 달달한 웃음을 준다. 서로를 아끼는 가족의 모습과 사이좋게 협동하는 이웃의 모습은 쉽게 믿기지는 않아도 훈훈한 기운을 불러일으킨다. 짐작할 수 있는 반전 장치들이 거부감 없는 이유도 박근형과 윤여정의 연기가 먼저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치밀한 서사에서 오는 만족보다 가족애의 그리움에서 비롯된 감동이 큰 영화다.
2015년 4월 2일 목요일 | 글_최정인 기자 (jeongin@movis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