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한국에서 개봉되기 전부터 봐서 그런지 한국에서 개봉된 후에도 영화관에 가서 직접 본 영화입니다.
할리우드나 국내영화가 아닌 발리우드 즉 인도에서 만든 영화였습니다. 수능이 다가오는 날짜와 같이 이 영화를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꼭 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가장 좋아한 영화중 하나인 죽은 시인과의 사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둘다 현 시대의 교육 시스템을 비판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 영화속 닐은 자신이 하는 것을 하고 결국 죽게 됩니다. 이와는 다르게 이 영화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되어 행복해 졌다는 이야기로 써집니다. 둘의 영화가 하나는 잔잔한 여운과 하나는 재미요소를
포함시켜서 다르지만 두 영화는 꼭 봤으면 좋겠습니다. 파르한은 비행기에서 전화 한통을 받고 비행기에서
아픈척을 해서 내리게 됩니다. 그가 비행기에서 내리기위한 이유는 란초라는 친구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파르한은 라주를 데리고 차투르가 불렀던 장소로 나왔습니다. 차투르는 10년 후 누가 더 성공을 했냐를
평가하기 위해서 란초를 찾은 것 같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그 셋은 란초를 찾기 위해 출발합니다.
인도의 천재들만 간다는 공대인 ICE의 입학생인 파르한과 라주는 같은 방을 쓰게 됩니다. 란초는 신입생에 대한
관습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짐을 가지고 들어오게 됩니다. 그는 남들과 같이 하지 않고 그 관습을 결국 깨버렸다.
수저에 전기를 연결해서 하는 행동은 정말 그가 이론이 아닌 이론을 가지고 적용을 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게 진정한 공대생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항상 이론을 가지고 수업을 해온다.
물론 이론이 적용을 하기전에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이론을 가지고 적용하지 않고 그냥 버려진다면
그 이론을 배운 것은 쉽게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ICE의 총장인 비루는 다른 사람에게 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의 아들은 자살을 하였고, 그 때문에 죽은 학생도 있다. 물론 직접적으로 그가 죽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살을 하기 위해선 어떠한 동기가 있을 텐데 그 동기를 간직접적으로 제공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정말 나쁜 사람인가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말그대로 현실의 우리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변화를 하기보다는 현실에서의 안정감과 타협 그리고 일등이 아니라면 기억해주지 않는 건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우리의 생각을 대변해 주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 살아가고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위치에 그가 있어서, 조금 더 나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란초는 이와는 극반대로 약간의 비현실적인 이상과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경쟁 위주의 교육시스템을 부정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인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렇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가는 길에 올바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가는 길이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조금 란초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쉬웠던 것 같습니다.란초의 중요한 친구인 라주는 노력보다는 기도를 하면서 신에게 기도를 합니다.
또한 빈민층의 가정환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라한은 사진찍기를 좋아하며, 평범한 수준의
가정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명의 친구는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성적에 맞추어서 전공을 선택하고 좋은 성적이 나오면 자신의 적성과 흥미와 관심이 없이 1등은 의사를 꿈꿔야 한다는 이러한 시대를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프라한은 보통의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회속에서 우리가 결정하는 직업은 우리를 그만큼 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사자 직업이 들어가면 좋은것 이라는 일반적인 줄서기의 통념처럼 1번은 좋은 것 2번은 좋은 것 100번은 안좋은 것 이렇게 직업 안에서 차별을 하게 됩니다. 사람이 좋든 안좋든 그 직업으로써 사람을 평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우리가 원하고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해보지 않고 사회가 만들어낸 규칙대로 직업을 선택하고 전공을 선택하고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프라한은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나 조차도 지금 현실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과연 내가 좋아하는 하는 일인지 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의 고민인 것 같습니다. 그가 중간에 말했던
“ 저희는 공학을 배우는 것 보다는 점수 잘 받는 방법만 배우고 있습니다.” 는 그를 강단에 서게 합니다.
그는 교육 시스템에 대해서 비판을 하게 됩니다. 교육이 아닌 조련이 된 이 현실을 말입니다. 이렇게 비루와
란초는 영화 속에서 대조를 느끼게 하며 갈등을 조장시킵니다. 나는 차투르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공이라는 것에 집착하여 무조건 암기를 해버린다. 그가 잘못 외워버린 연설문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잘못된 방식은 인정하지 않고 란초에게 10년뒤 누가 더 성공을 하게 되느냐의 식으로
비아냥을 하기도 한다. 10년 후에, 부사장이 된 그는 란초가 시골마을의 선생님이 된 것에 대해서
A는 Apple B는 Ball 하며 비아냥 거린다. 결국에는 란초가 계약을 꼭 성공시켜야할 푸쉬왕두 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그의 밑에서 다시 구걸을 하게 된다. 이 장면은 통쾌했다. 하지만 많은 것을 내포하는 것 같다.
누구나 알고 있는 대기업의 부사장이된 차투르는 다른 사람에게 존경받을만 하고 인정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해서 성공을 하게 된 란초를 이기지 못했다. 불편하게 느껴질 수 도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란초처럼 크게 성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만족을 하며
다른 사람을 인식하지 않았다. 우리는 남들의 평가와 시선에 의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눈이 보이지 않았다면 으리으리한 집도 삐가 뻔적한 차도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것 처럼 다른 사람을 인식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결국 파르한을 사진작가로, 란주를 취업에
성공할 수 있도로 이끌어낸 인물이다.
파르한과 란주는 10년뒤 자신의 삶에 만족을 하며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에서 주옥같은 말이 많이 나왔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조금만 용기를 냈다면 인생이 바뀌었을텐데...” 인것 같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우리는 변화하고 싶어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부모님의 만류, 사회적 인식, 군중의식 은 우리를 피폐하게 만든다.
정작 우리는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 밖에서 그러한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변화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