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곳
Shades of the Heart,2021

한때 난 내 자신을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던 적이 있다. 그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변을 정리하는 것이었고, 거기엔 나와 함께 추억을 나눈 정말 소중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한명씩 그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술도 마시며 나 스스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시간은 그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는 시간이자 동시에 내 추억과 영원히 작별을 고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그 기억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때 내가 한 말들은 전혀 기억에 없다. 엉망으로 뒤섞인 기억 속엔 어쩌면 내가 경험하지 못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진실들도 함께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남자가 차례대로 사람들을 만나며 대화를 나누는 영화 아무도 없는 곳은 마치 주체가 불분명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것은 꿈처럼 불친절하고 두서없이 흘러간다. 우리는 타인과 대화를 나눌 때 청자와 화자를 나누어 역할놀이를 하지 않는다. 서로 소통을 하며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럼에도 이 역시 제대로 이뤄진 소통이라 확신하긴 어렵다. 우리는 의외로 타인의 일에 크게 관심이 없으며 그들의 말에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도 있다. 결국 소통의 문제는 또 다른 소외를 야기한다.

열차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듯 카페 창가에 앉은 미영(이지은)은 졸음을 이겨내지 못한 모습으로 앞에 앉아있는 낯선 남자와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애인 혹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중국엔 그를 자식으로 인지하며 하나의 단편을 완성한다. 그들의 관계가 확실하게 정립되는 순간, 젊은 여자는 늙은 여인으로 변하고 그녀가 치매에 걸린 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창석(연우진)의 상상 같은 현실은 매우 불편하면서도 힘겨워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내뱉는 꾸며낸 이야기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번째로 만난 유진(윤혜리) 또한 그와 괜찮은 소통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녀는 좋은 말만 해준다는 창석과는 달리 가시가 담긴 말을 자주 내뱉는다. 글보다는 대외적인 활동을 잘한다는 대표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 재밌게 읽어줘서 고맙다는 창석의 말에도 그녀는 그렇게 말한 적 없다며 선을 긋는다. 보통은 농담이라는 식으로 넘어가겠지만 그녀는 창석의 소설을 좋아하니까 안심하라고 말한다. 창석과 유진의 관계는 그래서 더 감을 잡기 어렵지만 어둑해질 무렵 나누는 대화는 마치 창석의 아내를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유진의 아픔과 아내의 아픔은 전혀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하(김상호)의 경우도 조금은 다르게 흘러가는데 그는 거의 일방적으로 창석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내뱉는다. 청산가리에서 시작되는 병든 아내에 관한 이야기는 마치 썩은 동아줄을 부여잡는 심정으로 기적을 바라는 성하의 바람이 담겨있다. 그리고 현실은 기적에 대한 이야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바로 전해주며 성하의 희망을 무참히 짓밟아버린다. 바로 그 순간 창석이 챙긴 청산가리는 성하를 위함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챙긴 것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그 의심은 결국 마지막에 가서 풀리고야 만다.

기억을 못하는 주은(이주영)은 오히려 기억을 하지 못하기에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그녀는 창석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순간을 공유한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창석의 에피소드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 그 자리에서 생생히 살아있는 이야기로 남게 된다. 그리고 주은이 창석을 기억한다면 그 이야기가 매개가 되어 그와 연결될 것이다. 그렇게 기다림 없는 기다림 속에서 창석은 마지막 자신의 이야기와 마주하게 된다. 청산가리를 바라보며 아무도 없는 어둠 속을 거닐며, 자신을 죽음 절망 고독에 빠트리는 진실 혹은 진실이었던 실체와 통화하며, 그리고 가장 슬펐던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며..

어둠을 들여다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경험한 다양한 슬픔과 절망은 어느 날 느닷없이 무섭게 떠오르며 우릴 괴롭힌다. 특히 상실된 공간에 채워진 공허한 어둠을 바라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며 시간은 결코 그 이전으로 우릴 데려다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순간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가 기억하는 슬픈 아픔은 각자의 스토리 안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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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김종관의 영화를 좋아한다면..
어둡고 난해한 이야기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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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espoirvert (파일조 무비스토리 패널) |
| <저작권자 ⓒ 원하는 모든것 파일조 filej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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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종관배우: 연우진, 이지은, 윤혜리, 김상호, 이주영장르: 드라마등급: 15세 이상 관람가시간: 83분 개봉: 3월 31일 간단평아직 겨울과 맞닿아 있는 쌀쌀한 이른 봄, 소설가 ‘창석’(연우진)은 영국을 떠나 7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다. 긴 세월동안 많이도 변한 서울의 구석구석을 걸으며 ‘창석’은 오래된 카페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는 ‘미영’(이지은), 인도네시아 유학생이었던 남자친구와 이별한 ‘창석’의 후배이자 편집자 ‘유진’(윤혜리), 아픈 아내를 살리고 싶은 사진가 ‘성하’(김상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대신 손님들의 기억을 사는 바텐더 ‘주은’(이주영)을 만나게 된다. 삶, 죽음, 시간, 상실, 희망, 기억에 관한 네 가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창석’은 영국에 남겨두고 온 아내를 떠올린다. <아무도 없는 곳>은 <최악의 하루>(2016), <더 테이블>(2016) 등을 연출한 김종관 감독의 신작이다. 특별한 극적 사건 없이 대화 위주로 잔잔히 흘러가는 두 전작처럼 이번 작품 역시 상실과 죽음이라는 공통의 주제가 관통하는 ‘창석’과 네 사람과의 대화를 켜켜이 쌓아 나간다. 영화는 죽음, 늙음, 상실에 대한 서글픔을 말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 자리한 삶과 희망에 대한 기대를 조용히 내비친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아픔이 담긴 사연들을 따라가다보면, 여운이 긴 한 편의 옴니버스 소설을 읽은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때로는 어두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 어둠도 포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길 바란다."는 김종관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상실을 겪은 이들에게 담담한 위로를 전하는 작품이다. 다만 제한적인 공간과 인물, 잔잔한 스토리와 배우들의 담백하고 나긋나긋한 연기, 여기에 감독 특유의 서정적인 분위기가 더해져 호불호가 강하게 나뉠 듯 보인다. 김종관 감독과 <더 테이블>에서 합을 맞췄던 연우진을 필두로 이지은(아이유), 윤혜리, 김상호, 이주영 등이 등장해 단단한 연기로 몰입도를 끌어낸다.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 전주시네마 프로젝트 선정작이다.
2021년 3월 31일 수요일 | 글_이금용 기자 (geumyong@movist.com)